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평가 (문단 편집) ==== 소련 공격과 대미 선전포고 ==== 영국과 한창 전쟁 중이던 1941년,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한다"'''[* 물론 나치 사상이 사회주의자들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에 [[레벤스라움]] 문제도 같이 들어가 있기도 했었고.]는 의사를 피력했고 결국 영국 침공 실패 이후 전력을 재정비하여 [[바르바로사 작전|소련을 공격한다]]. '''기대와는 달리 정작 [[태평양 전쟁|일본은 도와줄 의사도]] [[할힌골 전투|능력도 없었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상태였으며, 독일한테 얻어맞은 영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또 소련 침공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식민지 주둔 잔여 프랑스군들과 영국군을 상대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련이 가장 취약하던 시점이었고 여기에 스탈린의 환상적인 트롤링까지 겹쳐서 초반에 독일군은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인해 궁극적인 목표였던 모스크바 점령은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병력 30만 명을 말아먹은 히틀러의 뻘짓 덕분에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인민 웨이브에 털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독일은 유럽을 거의 다 집어삼켰고 소련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했던 차에, 석유와 같은 필수 전쟁물자인 천연자원과 식량이 모자랐으므로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동유럽을 눈독들이고 있던 히틀러가 언젠가는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게다가 시기적 이로움도 있었다. 스탈린이 정적 대숙청을 하면서 여러 장성들이 처형당해 지휘체계가 엉망이었고 더욱이 히틀러가 소련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과소평가[* 실제로 독일군은 T-34전차의 45도 경사면 장갑으로 기동력과 방호력을 살린 것에 놀랐으며 이 외에도 PPSh-41, SVT-40의 성능을 고평가 하고 노획해서 잘 써먹었다. 소련군이 초반에 참패를 거듭하며 후퇴한 것은 대숙청으로 인한 군대의 마비, 소련-폴란드 국경에 있던 방어선에서 더 전진하여 독-소 국경에 새로운 방어선을 만들었던 것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 겨울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작계를 전환하는 중이어서 소련이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불가침 조약마저 파기하고 기습한 것이 완전히 허를 찌른 탓이다. 여러모로 소련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독일이 예상한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고 최근으로 올 수록 소련은 그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잘 싸웠다는 평가가 나오는 중이다.][* 또한 히틀러가 소련을 얕잡아 봤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것이 히틀러 뿐 아니라 독일군 전체가 똑같이 생각했다. 소련은 (결과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독일의 전면공격이 있을 것을 날짜까지 정확히 예측해낼 정도였지만 독일은 잘못된 정보에 의하여 소련이 3개월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고 전쟁 내내 소련의 총체적인 전쟁수행역량은 고사하고 당장 소련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그게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파악 못 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한 것도 한 몫을 했다. 한술 더 떠서 소련 침공 개시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는 일본 제국이 [[진주만 공습|미국을 건드리는 초대형 병크]]를 저질렀지만, 이에 '''매우 기뻐하며''' 본인들도 '''[[사망 플래그|미국에게도 선전포고했다.]]''' 물론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시기 자체가 늦춰지는 정도지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독일군 장성들도 대미 선전포고에 반대하지 않은 데다 말로는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영국 편을 들면서 잠수함을 선전포고 없이 격침시키는 미국에 분노한 해군은 내심 대미 개전을 바라고 있었고 무엇보다 양면전쟁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소련에게도 양면전쟁을 벌이게 할 수 있는 일본의 참전이 절실한 상황에 일본이 "독일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우리도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뻥을 쳤으니''' 일본에게 빅엿을 먹은(...) 히틀러만 바보라고 까기도 좀 뭣한 경우.[* 당시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한참 공략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정확히 히틀러의 삽질에 대한 OKW를 비롯한 장성들과 현역 병사들의 반응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말리지 않았다면 독일군 OKW가 프랑스 침공 작전 입안 시 만슈타인이 등장할 때까지 일부러 불가능한 계획을 낸 것처럼 무능하고 장기적 전쟁에 대한 식견이 매우 부족하다고 볼수 있다.][* 사실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피하려 애썼어도 루스벨트의 미국은 고립주의와 명분 부족, 처칠의 영국은 육군력 부족, 스탈린의 소련은 대숙청으로 불구가 된 군대를 회복시켜야 했기에 싸우지 않았을 뿐, 세 명 모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둘 다와 대극점에 위치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조질 생각을 하고 있어서 결국 독일은 셋의 다굴로 양면전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단기전으로 한쪽 전선을 빠르게 밀려 해도 미국과 영국은 해군력이 딸려 본토 접근이 안되고 소련은 국토가 더럽게 넓어 세 나라 모두 독일이 단기전으로 제압이 불가능한 상대다. ] --[[암흑마왕 대추적|히틀러: 사실은 오래 전부터 당신의 참전을 기다려왔다우. 히로히토: 솔직히 나도 그랬어. 히틀러: 정말로? 히로히토: 뻥이야]] 니네 동맹 맞냐-- 사실 1차 대전 때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술적 차원의 현란한 기동과 포위 섬멸 몇 차례로 나머지 전세계 열강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독일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다. [[밀덕후]] 총통 혼자만이 아니라, 이를 좋다고 따라한 군부와도 참 손발이 잘 맞았다. 그래서 이는 당시 독일이란 나라 전체의 국가 의식과 정치 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면 모른까, 히틀러 혼자만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점을 감안하면 애초에 현대에 와서는 이렇게 아무리 봐도 망상병으로 밖에 안 보이는 히틀러의 대외인식에 그토록 합리성을 중요시한다는 프로이센 군부가 무력하게 끌려다닌 것 또한 당시 '''동방의 슬라브 국가들은 서구 문명을 파괴하려는 [[운터멘쉬|열등민족]]으로 보면서도 또 역설적으로 서방의 영미와 프랑스는 자유주의적 퇴폐성 때문에 끝장난 문명으로 보았던''' [[전간기]] 독일의 독특한 우월주의적 사상, [[선민의식]]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